리플레이 파일, 이야기의 입체를 담은 데이터 유물

1. 게임적 공간에 대한 점유투쟁으로서 <에란겔: 다크투어>

지난해 2020년 11월 필자는 공공미술 프로젝트인 <가상정거장>팀과 만나 가상현실 공간에서 시민들이 만나 무엇인가 가치 있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공연을 구상했었다. 현실과 가상의 구분이 무의미하고, 양쪽의 신체와 사회적 관계가 이어질 수 있다는 메타버스 담론이 유행이지만 막상 당장 이런 경험을 주선할 기술적 조건을 갖춘 플랫폼은 생각보다 적었다. 이미 안정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사례가 <마인크래프트>나 <로블럭스>, <포트나이트> 등의 게임 안에 존재하지만 이를 이용해 가벼운 이벤트를 할 수는 있어도 어떤 메시지를 담은 진지한 작품을 만들기는 어려워 보였다. 고민을 하던 중, 과거 동료들과 2017년 성균관대에서 실험적으로 개설했던 <게임과 현실>이라는 수업에서 게임 <배틀그라운드> 속에서 특별강연을 진행했던 사례를 떠올리게 되었고 이를 응용해 100명의 낯선 사람들이 한날한시에 가상공간에 모여 강연과 연극, 춤을 뒤섞은 플래시몹을 하는 기획으로 발전시키게 되었다. 우리는 이를 <에란겔: 다크투어>라고 명명했다.

<에란겔: 다크투어>는 게임 <배틀그라운드>의 주요 스테이지인 에란겔 섬을 공연의 무대로 삼는다. 우리는 기존의 100:1이라는 생존주의적인 배틀로얄 규칙을 무시하고 에란겔 섬을 순수한 탐험의 공간으로 전유해 강의를 같이 듣고 춤을 추는 행위로 채워 넣고자 했다. ‘다크투어’라는 명명은 이 게임공간이 끝없이 전쟁이 벌어지는 폐허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몰락한 구소련의 한 연방을 연상케 하는 각종 오브젝트들이 많았기에 붙인 것이다. 매일 죽고 죽이는 이 게임공간을 재해석해 스토리텔링화하는 일은 현실의 비극적인 역사공간을 음미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고 판단했다.

<에란겔: 다크투어>는 특정 게임 혹은 코드적 공간에 대한 불법적 점유운동의 성격을 갖는다. 기존 장치의 흐름을 끊어버리려 하는 반항심 가득한 상황주의적 태도가 저변에 깔려있다고 할 수 있다. 특정한 게임 디자인이 강제하는 놀이경험과 감정을 거스르고 게임을 전유하는 방식의 퍼포먼스에는 몇 가지 주요한 선례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오르한 킵칵과 라인하르트 우르반의 <Ars doom>(1995)은 슈팅게임 <Doom>(1993)을 개조해서 현대예술의 오브젝트를 적 괴물 대신 배치해 게임공간 속에서 예술계를 풍자적으로 읽도록 만든 사례다. 이 작품은 게임이라는 뉴미디어를 이용해 예술작품을 만들었다는 데 그 의미를 두었다.

아트게임 <Arsdoom>(1995)의 스크린샷

<벨벳 스크라이크>(2003)의 스크린 샷

반면, <Velvet Strike>(2003)는 9.11테러로 미국 내 이슬람권에 대한 혐오가 극명했던 시절, 게임 <카운터스트라이크>에서 일어난 각종 인종주의적 괴롭힘에 대한 반항의 의미로 참가자들이 특정한 메시지를 담은 스프레이 표현을 게임 공간 내 담벼락에 게시해 일반적인 슈팅게임의 룰을 거스르는 프로젝트였다. 다중접속 총격전이라는 놀이형식을 특정한 이데올로기의 리허설로 전락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게임공간을 전유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에란겔: 다크투어>의 의도는 <Arsdoom>과 <Velvet Strike> 사이 어딘가에 위치해 있었다. 코로나19로 인해 무너진 공공성을 가상공간 속에서 찾기 위해 게임을 활용하지만 동시에 당대 가장 인기있는 게임인 <배틀그라운드>의 이데올로기를 풍자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으로까지 발전시키고자 했다. 공연의 방향을 토론하는 가운데, 함께 참여한 게임씽킹 디자이너 권보연 선생은 과거 <Uru>(2003)라는 게임에서 일어났던 일을 참고사례로 소개해 주었다. <Uru>를 즐기는 게이머들을 우루인들이라 지칭했는데, 그들은 게임 속에서 레벨을 얻거나 승부를 보는데는 관심이 없고, 공간을 탐험하고 같이 노래하고 춤추는 데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Uru>의 게임성이 애초 그렇게 디자인되었고 게임을 사랑하는 사람들 또한 그 게임성을 적극 발전시켜 가상의 부족민으로서 정체성으로 삼는 데까지 나아간 것이다. 상업성이 약했던 <Uru>가 서버를 종료하자 갈 곳이 없던 우루인들은 <There>(2003)라는 소셜네트워크 기반의 게임으로 집단 이주를 하기 시작했다. 데어는 우루와 다른 게임이었지만 우루인들이 보기에는 우루인들의 부족적 특징을 수용할만한 게임적 공간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문제는 우루인들이 집단적으로 이주하자 기존의 데어인들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우루인들이 집단적으로 행진을 할 때면 게임의 트래픽이 증가하여 정상적인 게임운영이 어려웠고, 우루인들이 플레이 문화를 데어에 가져오는 일이 무의식적으로 싫었던 것이다. 이같은 문제가 발생하자 데어 운영진은 우루인들에게 특별거주지로 섬을 하나 내어주게 되었다. 우루인들은 그곳에서 데어의 게임성과 별도의 우루인들의 플레이 방식을 선보이며 기묘한 공존을 했다고 한다. 이 사례는 게임의 룰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최초에는 놀이의 규칙으로 시작했지만 그것의 사용자가 자기 신체 안에 특정한 습속으로 받아들였을 때, 룰은 더 이상 게임 내부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켜야 할 규약에서 보존해야 할 집단적인 문화적 자산으로 발전한다. 이 때 룰을 개조할 수 있는 권한은 게임디자이너가 아니라 게이머에게 있는 것이다. 이는 <에란겔: 다크투어>를 기획할 때 중요한 참조점이었다. 게임적 공간을 단순히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점유해, 게임의 룰을 바꾸는 반역의 경험을 시키자는 것이 공연의 목표가 되었다. 장기화된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우리는 어느덧 디지털 공간의 경험을 플랫폼의 알고리듬에 맡기면서 더 이상 룰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 자가 되어가고 있기에 공연의 의미를 게이머에 맞추는 쪽으로 만들어가려 했다.

2. 머시니마적 표현의 새로운 가능성

전체 공연의 플로우는 다음과 같다. 사전에 신청한 관객 100명은 섬 세 곳으로 흩어진다. 각기 섬 안에서 역할을 맡은 원주민(게임평론가 이경혁), 이주민(게임씽킹 디자이너 권보연, 연구자 장병호), 이방인(기계비평가 이영준)은 미리 도착해 관객들을 기다리고 미리 준비한 말로써 그들을 이끈다.

이들이 각기 발화할 내용은 원주민의 경우, 배틀로얄 장르를 왜 우리가 재밌다고 느끼는 지에 대한 자기질문으로 시작한다. 생존주의의 훈련으로서 배틀로얄 장르와 죽음 앞에 만인의 평등함을 보여주는 배틀로얄 장르의 특이점을 대비시키고 토론할 수 있는 주제를 관객에 남긴다. 결국 역사가 없는 텅빈 게임공간에 우리의 실제 삶의 투쟁을 환상적으로 타자화, 외부화한 것이 아닌가 질문하며 끝을 맺도록 했다.

이주민의 경우, 배틀로얄 장르가 아닌 채집수렵 일상 장르인 <동물의 숲>의 게이머가 배틀그라운드로 와서 느낀 당혹스러운 지점을 토로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틀그라운드의 게임적 장치를 이용해 자기 스스로 유희를 만드는 천연덕스러운 플레이 감각을 관객들에게 권유하는 내용으로 진행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게임이 바뀌어도 게이머가 같다면, 게임의 룰은 언제나 게이머라는 기준으로 재조정될 수 있음을 주장한다. 또한 현재로서는 가상세계로의 입장권을 얻는 일이 생각보다 평등하지 않으며 가상공간이 기술적 괴짜나 돈 많은 사람들의 취미가 되는 것을 비판하며 끝을 맺는다.

이방인의 경우, 게임을 전혀 모르는 기계비평가가 게임 속 발전소에 와서 게임적 오브젝트로 기획되어 그 구성원리부터가 엉망인 기계-사물을 일부러 진지하게 비평한다. 이 비평행위가 한편의 부조리한 연극이다. 만인에 대한 생존투쟁의 장인 배틀그라운드가 오히려 어떤 철학책보다 급진적인 인간상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궤변을 내놓고 끝을 맺는다.

이러한 세 가지 강연기반 퍼포먼스를 통해 기존에 질문 없이 재밌게 즐기던 배틀로얄 장르인 게임 <배틀그라운드>는 다소 비판적 거리를 얻은 채 해석할 수 있는 텍스트가 된다. 이후 그들이 평소에는 살아남기 바빠 볼 수 없었던 게임 속 풍경을 천천히 탐색하고 자기기록으로 남기다가 게임의 막바지에 가서 집단적인 의식의 춤을 추는 것이 전체적인 공연의 흐름이었다.

나열해 놓으니 공연의 성격이 다소 복합적이다. 연극적 요소가 가미된 비평문과 가상공간에 대한 투어와 상호작용, 참가자들의 집단적 의식에 대한 실시간 중계가 뒤섞여 있다. 또한 관객의 참여방식도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게임 공간 내로 다이빙해 들어온 참여자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들의 전체모습을 중계 받아보는 유튜브 시청자들이었다. 이는 공연 내에 인터랙션의 구조를 디자인하되, 그것의 배치를 통해 약 60여분 동안 의미가 있는 영상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다행히도 게임 <배틀그라운드>의 속도감 있는 이동장면과 일반적인 영화에서는 구현할 수 없는 드론뷰를 연출함으로써 내용적 의미가 없는 장면일지라도 보는 재미를 구현하는 방법을 발견하게 되었다. 게임엔진만의 독특한 시각적 스타일을 통해 실시간 중계 시 중간 중간 멘트나 스크립트가 비는 단점을 보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에란겔: 다크투어>는 기술적으로 머시니마 장르로 분류된다. 머시니마(Machinima)는 게임엔진을 표현의 재료와 무대로 사용하는 방법과 결과물이다.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머신(Machine)과 영화(Cinema) 그리고 애니메이션(Animation) 합성어인 머시니마는 그 기원을 비디오 게임 <스턴트 아일랜드(1992)>에 두고 있다는 것이 세간의 평가다. 플레이어의 게임 장면을 기록하고 다시 재생할 수 있었던 이 3D 게임은 영상 제작 도구로써의 게임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플레이어는 가장 멋진 스턴트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반복적인 플레이를 하게 되고, 자신의 플레이 장면을 기록사진처럼 남긴다. 처음에는 다소 소박하게 게임 속 기념품 제작으로 시작한 머시니마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 기계에 의한 영화, 애니메이션 제작이라는 개념을 살려나가기 시작했다. 기존의 영화나 애니메이션 작업은 디지털의 방법이지만 어찌되었든 단 한 장면의 텍스쳐를 무게감 있도록 만드는 작업에 중점을 두었다면, 머시니마 작업은 표현의 제약과 텍스쳐의 조악함을 감수하고서라도 제작의 스피드와 간편성에 중점을 둔다. 이 같은 머시니마를 박용주는 “컴퓨터로 하는 인형극”(박용주, 「MMORPG의 머시니마를 통한 영상미디어의 확장성 연구」, 『한국컴퓨터게임학회논문지』 25, 2012, p. 107.)이라고 표현했다. 우리는 머시니마를 가상 프로덕션 환경 속에서 펼쳐질 자기표현방식의 예시(豫示)적 현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에란겔: 다크투어>의 스크린샷 (제공: 가상정거장)

그런데 문제는 새로운 게임규칙을 수립해 나가는 과정을 인위적으로 강제한다면 참가자들에게 또 다른 룰을 강요하는 것이어서 작품이 자기모순에 빠진다는 점이었다. 이에 과감히 게임 내 모든 행동에 기존의 게임과 같은 자유와 우연성을 부여하기로 했다. 우선 참가자들은 총기를 휴대할 수 있고, 이를 이용해 리드 퍼포머나 동료참가자들을 죽일 수 있도록 허락했다. 누군가를 죽일 수 있지만 죽이지 않는 일이 단지 죽이지 않도록 강제되는 일보다 더 큰 가치를 가지며, 이 작품 진행상의 긴장도를 높여 더욱 일회적인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여기에 이 게임은 최종 목적지를 랜덤하게 발생시키는데, 이를 회피할 방법을 따로 개발사에 문의해 찾지 않고 이 우연성을 공연의 룰로 수용하였다. 자기모순을 회피하기 위해 받아들였던 이러한 자유도와 우연성은 이후 이 작품에 대해 연출자인 나도 전혀 깨닫지 못한 새로운 내용의 원인이 된다. 후술할 예정이지만 필자는 하나의 작가가 결코 통제할 수 없는 입체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참가자들이 기록한 에란겔 섬의 풍경들. (C)김승범.

참가자들이 기록한 에란겔 섬의 풍경들. (C)김태연.

공연의 결과는 나름 흥미로웠다. 3월 20-21일 양일간 진행된 퍼포먼스 상에서 누구도 서로에게 총질을 하지 않았다. 총을 쏘지 말자고 몇 번의 권유를 했을 뿐, 시스템적으로 금지한 것은 아니었다. <배틀그라운드>의 본래 게임경험은 어디서든 총알이 날아올 수 있는 극한의 긴장 속에서 살아남는 한 사람이 되고자 온갖 술수를 쓰는 것이었지만, 퍼포먼스 내내 모든 게이머는 저격될 위험을 잊고 에란겔 섬에 풍부히 많은 사물과 자연풍광을 음미했다. 이는 이 게임이 4년 넘도록 서비스되면서도 게이머들에게 전혀 선물해 주지 못한 경험이었다. 참가자 각자가 기록한 게임 내 풍경사진은 아름다웠다. 안개 낀 개활지를 느린 호흡으로 찍거나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가 주변지역을 담아내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게임 내에서 가능한 경험이었지만 해방되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이 경험을 고스란히 참가자들에게 전달해 주었다는 점에서 우선 이 공연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었다. 반면에 유튜브로 지켜보던 시청자들은 마지막 산언덕에서 집단적으로 추는 평화의 춤을 게임 참가자들이 거의 개미만한 수준으로 작아 보일 때까지 상승해 보는 드론뷰의 경험을 했다. 이 뷰를 통해서 마지막으로 좁혀 들어오는 자기장은 기하학적으로 원의 모양으로 연출되어 소멸하는 점이 되어갔다. 이 경우 플레이어와 게임 내 시스템은 모두 미장센으로 기능했다. 게임 내부 참여자들은 전혀 느끼지 못하는 감각이었다. 게임이 본래 제공했던 환경-객체들의 아름다움과 시스템이 허용한 옵저버 뷰가 게임의 내부와 외부에서의 경험을 모두 특별하게 만들었다.

드론뷰로 보는 <에란겔: 다크투어>의 마지막 생존자들의 모습

3. 리플레이 파일, 이야기의 입체를 담은 데이터 유물

필자는 이 공연의 진짜 숨은 의미를 공연이 끝난 후에야 깨닫게 되었다. 실은 이 점이 이 글을 쓰게 만든 동기다. 게임 <배틀그라운드>는 게임의 리플레이 파일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는데, 이 말인즉 이 작품은 실은 실시간 플래시몹이나 편집가능한 영상의 형태가 아니라 언제든지 열람할 수 있는 데이터의 형태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리플레이 파일만 가지고 있다면 과거에 일회적으로 진행했던 이 퍼포먼스의 모든 참가자들의 이동상황과 행동, 객체들의 움직임을 다시 추적할 수 있으며 마음만 먹으면 타란티노 스타일로도, 타르코프스키 스타일로도 재연출 가능한 것이다. 데이터를 확인해 보니 4채널로 실시간 중계했던 영상 이미지에도 포착되지 않는 많은 움직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한 그룹의 게이머들은 전체 리드 퍼포먼서를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배를 타고 다른 지역을 탐험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다른 게이머는 서울 시내의 1/8에 해당하는 에란겔 섬을 뒤지고 다니면서 섬에 12대 정도 랜덤하게 떨어진 비행기를 찾고 급유까지 해 마지막 자기장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실시간 중계 영상의 마지막 부분에 잠시 스쳐지나간다. 이 게임의 시스템을 아는 사람은 멀리서 작게 보이는 그의 비행기를 하나의 점으로 읽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수키로 미터 떨어진 먼 곳에서 이 곳으로 오기 위해 겪었을 시간과 공간의 이동을 감각했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공연이 끝난 뒤 실시된 아티스트 토크에 들어와 증언한 한 참가자의 경우, 본래 섹션 3의 이방인 퍼포먼서를 수류탄으로 암살하려 했지만 네트워크 장애로 본인이 튕겨져나가 의도가 실패했음을 증언하기도 했다.

연출자로서 필자가 받은 충격은 곳곳에 배치한 리드 퍼포먼서와 조교들의 통제를 받지 않고, 또한 실시간으로 중계된 4개의 카메라에도 잡히지 않았던 움직임이 있었다는 사실보다 이 공연의 본질이 실은 전통적인 양식으로 모두 포착되지 않는 데이터라는 깨달음이었다. 생각해보면 게임적 자원 내에서 표현은 내가 감지하는 프레임 밖에서도 여전히 존재하고 작동하는 객체들의 연합들이다. 영화나 소설은 카메라의 프레임이나 서술자 시선 밖으로 넘어갈 수 없다. 그 밖은 대부분 텅 빈 무대이거나 주인공의 사건서술을 위한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게임적 환경에서는 플레이어는 언제든지 시선을 돌려 모든 환경을 음미할 수 있으며, 인공지능이 부여된 npc(플레이 불가능한 캐릭터들)은 고유의 자기 스토리를 가지고 스스로 일상을 영위한다.

<에란겔: 다크투어>의 모든 총체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연출자인 나는 실은 리플레이 파일을 공개했어야 했다. 이는 전통적인 스토리텔링이나 영화의 몽타쥬 기법에 대해 그들이 보여주는 사건이란 어찌되었거나 주인공의 장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일부의 세계에 불과하다는 점을 폭로한다. 생각해보면 스토리상으로 지나가는 조연일지라도 고유의 스토리가 존재할 수 있으며, 어쩌면 그러한 객체들의 연합이 주인공의 특별한 사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아닌가 반문해 볼 수 있다.

앙드레 바쟁은 <완전 영화의 신화>(1946)라는 글에서 영화라는 매체가 우연한 기술적 산물이 아니라 아주 오래된 필연적인 관념의 산물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의 논의는 영화는 세계를 총체적으로 담아내려는 오랜 욕망의 산물이며, 이는 동굴벽화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영화가 생겨났기에 영화적인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영화 이전부터 영화적인 것이 있다는 역전된 논리다. 다시 말해 영화라는 관념이 은입자를 활용한 필름, 정교한 기계장치 이전에 존재해왔으며 그것은 현실의 완전하고도 총체적인 재현과 외부세계의 완전한 복원을 꿈꾸어 왔다는 말이다. 이 같은 관점은 바흐친의 다성성 개념(<도스토예프스키 시학의 제 문제>(1929)과도 연결된다. 소설이라는 총체적 표상의 세계 속에서 각각의 인물은 스스로의 성조를 가지고 있으며, 이 총체를 드러내려는 것이 소설의 임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제 아무리 필름 프레임 안에 많은 객체를 포함한들, 심도를 깊게 표현한들 우리들은 프레임 밖으로 넘어서지는 못한다. 이는 소설의 내러티브 기술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소설 속에서 서술자 프레임 밖으로 넘어가기 위해 서술자의 위치를 변덕스럽게 바꾸기 쉽지 않으며 궁극적으로 개연성이라는 인과율 너머로 사건을 발전시키는 더욱 어려운 것이다.

당초 게임적 자원을 전유해 메타버스적 공간을 구현하고 그 안에서 게임비평을 실천하려 했던 필자는 이 공연이 한 작가의 특정한 의도를 넘어서 참여한 모든 이들의 서사를 발휘시킬 수 있음을 발견했다. 이는 과거 영화의 촬영과 편집기술이 연극배우의 선형적인 시공간을 해체시키고, 재조합해 새로운 시공간의 탄생으로 이어진 것과 비교해보면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이 경우 배우는 우선 편집실의 의도로부터 소외된다. 대신 일회적 연극무대라는 작은 세계는 영화적 허구의 세계로 확장될 수 있었다. 반면 게임엔진을 사용한 머시니마의 경우, 이 확장된 세계는 프레임 안으로만 연출된 조작된 세계만이 아니라 프레임 밖으로 연결되어 있는 수많은 상호작용의 객체들로 가득한 세계로 확장가능하다. 이 세계에 참여하는 배우는 더 이상 몽타쥬 구성의 노예가 아닌 움직임 그 자체를 구현하고 활보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는 주연이 아니더라도 자기 이야기를 갖는 존재다.

이는 우리들의 시대에 스토리텔링의 전위가 어떻게 마련될 수 있는가에 대해 영감을 준다. 하나의 세계 안에 무한히 다른 스토리가 생성되는 입체로서의 스토리가 바로 게임엔진의 환경에서 구현가능하다는 것이다. 바쟁의 표현을 빌리면 영화 이전에 영화적인 것이 있다. 이는 세계의 총체에 대한 표현에 대한 우리들의 욕망과 환상을 의미한다. 완전영화라는 개념은 게임기술에 기반 한 가상현실에서 펼쳐질 가능성이 높다. 다음 세대는 디지털 공간에 구현된 이야기의 입체를 담은 데이터를 마치 신화나 설화를 추적하듯이 하나의 유물로서 취급해 연구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오영진

Young Jin Oh

2015년부터 한양대학교 에리카 교과목 [소프트웨어와 인문비평]을 개발하고 [기계비평]의 기획자로 활동해 왔다. 컴퓨터게임과 웹툰, 소셜 네트워크 등으로 대변되는 디지털 문화의 미학과 정치성을 연구하고 있다. 시리아난민을 소재로 한 웹반응형 인터랙티브 스토리 <햇살 아래서>(2018)의 공동개발자이다. 가상세계에서 비극적 사건의 장소를 체험하는 다크투어리즘 <에란겔: 다크투어>(2021.03.20-21)와 학술대회 [SF와 지정학적 미학] 연계 메타버스 <끝나지 않는 항해>(2021.12. 6~19)를 연출했다.